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vs. 진화론,이슬람,동성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상,모든 종교, 모든 관습으로부터의 자유다. 예수께서 나의 모든 죄를 대속하였기에 죄책감으로 부터의 자유, 율법 대신 은혜를 선포하셨기에 형식으로 부터의 자유, 우리의 삶 모든 것을 책임지신 다는 믿음이 있기에 경제적인 삶을 포함하여 모든 삶으로 부터의 자유다. 공중의 참새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이다.
기독교의 이슬람과 차이는 자유의 차이다. 이슬람은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율법,샤리아를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개종도 금지한다. 마호멧을 모욕하거나 코란을 모독하면 투옥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을 믿든 떠나든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따르든 거절하든 그것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결코 강제하지 않는다. 선악과를 따먹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가도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 예수님도 그러셨다.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드러내셨을 때 예수를 따르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떠났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너희도 떠나려느냐?' 예수님은 제자들마저 떠날 것인가, 남은 것인가도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셨다. 심지어 가롯유다가 배반하여 떠날 때에도 그의 선택에 대하여 강제하지 않으셨다.
인간에게 스스로의 결정권이 보장되었을 때 인간은 존귀한 존재가 된다. 억압되고 강요되었을 때 인간은 동물과 같이 길들여 지는 존재,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체로 창조하셨다. 자신의 생명을 불어 넣으시고, 그 인간을 사랑하시며 이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까지 주셨고, 종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자식이라고 부르신다. 이 분이 기독교의 하나님이다.
인간에게 제도,틀을 씌우는 것은 안된다. 합리적인 관리를 위하여 제도는 있을수 있지만 그것이 개인의 결정권을 침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이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주재할수 있는 존재는 아닌것 같다.
19세기 이후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는 풍조가 일어났다.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칼 마르크스의 1848년 '공산당 선언' 니체의 작품들은 19세기에 어떤 정신적 풍조가 성행했는지를 보여준다.
19세기는 본격적으로 탈하나님 시대였다. 전통적인 하나님 신앙은 버려지고 인간이 주도적인 세상, 모든 만물이 우연히 생겨났고 그 속에서 인간은 최고로 진화한 고등 동물로서 세상을 지배한다는 이론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관리해야 하고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하는 고독한 존재가 바로 19세기의 인간이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세속적인 일반 가치관이 된 것이다.
인간이 과연 그렇까? 인간이 더 스스로 주체성을 가지고 더 행복한 존재가 되었을까? 아니다. 인간은 극도의 불안에 휩싸여 살게 되었다. 니체는 정신분열로 죽었다. 이러한 사고를 갖고 있었던 사람은 한결같이 결코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나는 세상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모른다.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십억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고, 이러한 생물군은 몇 억년 전의 것이라는 얘기를 할 때는 고개가 걔우뚱해 진다. 그것을 어떻게 알수 있었는가다. 1만년 저의 일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추정할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럴 개연성을 전제로 두고 추측하는데, 그것을 그렇다고 아무 의심없이 믿는 것이 오늘의 사람들인것 같다. 진화론도 하나의 이론에 불과함에도 그것이 사실인양 믿어버린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어떻게 이런 것,증명되지 않는 이것은 의심도 없이 잘 믿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우주의 오묘한 질서, 인간 몸의 그 신비한 조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그 신비한 질서가 어떻게 우연히 발행할수 있는지 그것은 알수가 없다.
절대적인 존재. 그리고 우연히 이 모든 것이 생겨냤다는 이론.
어느 것이 맞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어느 것이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데 좋은 이론일까?
나는 인간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고독한 존재이기 보다는, 절대자 하나님의 있어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인간을 위해 대신 자기 아들까지 죽게 하셔서 사랑하시고, 그 인간의 주체성을 인정하셔서 스스로의 인생을 선택하게 하시고, 그 인격체 인간과 서로 교류하는 하나님, 절대자로서 그 인간을 돌보고 그의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설정하는 것이 더욱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
나는 그 하나님을 믿고자 한다. 인간의 주체성을 인정하시는 그 '선악과의 하나님'을 믿고자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신비한 하나님이다. 나는 위에서 일반적인 한 인간, 하나님 체험이 없는 한 인간으로서 말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내게 개인적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이다. 나는 적어도 3번 이상 그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다. 2번은 꿈에 나타나셨고 1번은 사업을 시작할 때 나에게 강력한 감동으로 다가오셨다. 그러기에 나 한 개인으로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한 이상 이러한 합리적인 추론에 의하여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개인의 체험에 의하여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체험을 종교이다.
martin Luther 그는 용감한 사람이다. 그는 중세 1천년의 역사,인간이 교황의 종으로 사는 것으로부터, 그들의 전통과 형식의 종으로 사는 것으로 부터 해방시킨 지도자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400년간의 종살이에서 그들을 해방시켰다면 루터는 근세를 연 혁명가이다. 또한 바울은 모세 이후 1천5백년간 이스라엘 백성을 옥좨고 있었던 모세의 율법으로 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위대한 사람이다.
각 시대 별도 엄청한 일을 한 사람들이다. 육체적인 형틀에서 인간을 해방한 것이 모세라며, 생각의 형식과 틀에서 인간을 해방한 것이 바울이며, 삶의 제도와 형식에서 인간의 자주성을 회복한 것이 루터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를 옥죄고 있는 우리를 노예로 만든 틀은 무엇인가?
무신론이다. 진화론이다. 그리고 아직도 중세의 잔재가 남아있는 폭력적인 이슬람 계율이다. 인간 스스로의 권력에의 의지한다는 무신론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안다. 진화론이 얼마나 거짓인지도 안다. 이슬람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도 안다.
이 벽들을 제거하는 것이 오늘 루터가 종교의 틀에서 인간을 해방한 지 5백년이 된 오늘의 사명이 아닌가? 이 시대에도 인간을 해방시키는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는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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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동성애,이슬람
이것들은 학문적으로든지, 그것이 자기일이 아니라 제3자의 일이라면 이들에 대하여 너그러운 마음을 갖을 수 있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정신분열자가 되는 것이 나의 일이라면(니체가 그랬듯이), 동성애가 나의 아들이나 딸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면, 무슬림이 우리 사회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종교적인 관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회 문화적으로 속박을 가하고 그 계율에 따르지 않을 경우 죽이는 이슬람 사회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간은 자연발생되어 진화한 존재로서 독립적인 존재이며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초인이라는 주장을 하는 그 논리에 따르다가 정신병자까지 된다면 무신론을 받아들이겠는가? 인간은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같은 존재임에도 말이다.
더우기 내 아들이 동성애를 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성향이니 그렇게 살라고 인정할 부모가 있을까? 있다면 그 부모가 문제의 사람일 것이다.
이럿듯이 우리가 흔히 인권,공정,평등,자율,종교의 자유 등 미화된 말로 포장된 이 죄악에 대하여 단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내면에 숨겨진 악의 실상을 모두 끄집어내어 그 허구를 밝혀야 한다. 인간을 좀먹고 죽게하는 이것을 고발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인간 역시 최고로 진화한 고등동물일 뿐이다. 존엄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회와 국가는 관리차원에서 인간을 다룰 뿐이다. 더 유능한 자가 그렇지 못한 다수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지금의 유물론 사회가 그렇지 않은가? 공산사회 평등사회를 이룬다고 하지만 더욱 독재적이고 불평등한 압제의 사회가 바로 이들이 아닌가? 러시아 중국 북한 등이 그렇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그렇게 된다. 나의 인격이 존엄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그 강압 사회에 놓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무신론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