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pool

세상 윤리, 개신교 윤리

동완 2012. 4. 23. 09:41

2010년 말의 일이다.  대학 친구들 끼리 모여 송년회를 하였다.  그들 중에 독실한 기독교 친구가 있었는데   한 친구가 물었다. '너 맹세코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한적 없니?'  기독교 친구는 아주  난처해 했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으레이 한잔 하면 스스럼 없이 이런 이야기가 나올수 있는데도 말이다.

 

왜 그 친구는 하나님께 맹세를 운운하면서 가장 개인적인 것을 건드리는 걸까?  그랬다. 그들에게 있어  성이라는 것은 그저 유희였다.  서로 마음이 통하면,그리고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주위에서 그것에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한  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러므로 당사자만 합의하면  언제든지 가능한 것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정색을 하고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은 그들과 다른 성윤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그들 역시 인정하고 있음이리라.

 

 

세상의 윤리와 기독교 윤리는 어떻게 다른가? 

나는 어제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를 읽었다.  최단 시일 최대 부수를 기록한 책이라고 한다.  인간성의 진솔함을 담고 있었다. 아버지이기 전에 한 인간의 한계,인간의 소심함을  담았다.   그러면서 인간의 성적인 본능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 사회에서  자기 아버지에 대한 부끄러움, 창피함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 절망,자포자기 등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장면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두고 주인공 정수는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것을 부인이 알게 되지만 부인은 오히려 남편의 편안한 죽음을 위해 그녀에게 자기 남편 옆을 지켜주도록 부탁한다.  죽음 앞에서 그들은 울부짖으며 절망의 절규를 한다. 욕지거리, 어찌할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저주한다. 그렇게 정수는 죽어갔고 모든 이의 기억 속에서 그도 점점 잊혀갔다. 

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은 오늘날의 아버지를 극적으로 표현했다는 공감대였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하여 기독교 윤리(특히 개신교 윤리)와 세상 윤리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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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그런것 같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자연적인 일상 일탈 행위는 전혀 낯설지 않다. 자연스럽다. 마치 고대 축제의 현장에서 집단 섹스가 축제의 한 과정이었듯이 평상시에는 용인되지 않던 행위도 죽음 앞에서는, 신을 빙자한 축제의 현장에서는 자연스럽게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세상의 윤리이다. 고대에는 심지어 자기의 자녀를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는 행위도 신성한 것으로 여긴다.  심청의 이야기도 그 일종이라고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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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해 보았다. 소설 '아버지'라는 상황이 실제 상황이고, 이것이 기독교 가정에서 벌어졌다면 어땠을까?  내가 주인공 '정수'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본다.

 

아마도 나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을 것 같다. 이 땅에서 나의 분깃이 여기까지구나 생각하고 하나님의 시간표에 순복했을 것 같다. 그렇게 발버둥, 만취한 상태에서 나날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성적인 일탈도 없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울고 불고 욕지거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도 한 과정이며, 이 세상의 삶을 이렇게 마치는 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2007년 죽음이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억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최선을 다하여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가족들이었다. 여유있는 삶을 보장하지는 못할 망정 부채만 남기고 집 한채도 없고 통장에 잔고 한푼 없이 떠나는 것이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거래처에게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떠너는 것이 미안할 따름이었다. 다른 것은 없었다.

 

이조 시대의 윤리, 유교 윤리도 세상적인 윤리 중에서는 대단히 발전된 윤리이다.

그러나 그 윤리 역시 성적 윤리를 보면  남자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한 반면, 여자에게는 가혹하게 엄격했다. 가진자, 집권층에게는 관대한 윤리였지만, 못 가진 자에게는 가혹한 윤리였다. 개인의 인권보다는 집단의 윤리가 우선시되는 윤리였다.

지구상 곳곳에 여러 문화와 윤리들이 있다.  그 윤리 속에는 비인간적인  요소들이 얼마쯤을 다 섞여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그래서는 안되는 그런 윤리지만  세상에서는 묵인되고 통용되는 윤리 말이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합의되었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윤리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인간은 각각 하나님과 1:1의 관계이지 누구를 매개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인간은 각각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누구도 침해할수 없는 인권에 의한다고.   그러므로 그 누구를 위하여 개인이 희생될수 없으며, 집단을 위해 희생될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권리와 인격을 갖고 있음이 기독교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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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향하여 그렇게 원하는데 가끔씩 안아준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아내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는것이 예의 이겠지만.  그러나 아내가 안다 하더라도 그쯤은 용인할 것이다.  세상 대부분의 남자들이 으레이 그리하는 것이기에.  그렇다고 가정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상대 여자가 원할 때 그녀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행위마저 죄악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여자로서 이해할 것이다. 

 

세상의 윤리는그렇다. 감정의 흐름을 인정한다. 기본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죄악시 하지 않는다. 성경(구약)에서도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대하여는, 권리를 갖고 있는 상대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한 침묵하고 있음을 본다.  유부녀와 통간하는 것은 엄히 다스리지만(사형), 부인이 용인하는 가운데 결혼하지 않은 다른 여자와의 성관계는 용인하고 있다.  그런데  여자에게는 동일한 원칙이 적용이 되지는 않는다. 남자들이란 자기의 여자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 갖는 것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불평등이라고 여겨지지만 이것은 본능이다. 여자와 남자가 본능적으로 다른 점이기에 어쩔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신약)에는 남자에게도 이러한 의무가 요구되고 있다. 자기 외에 다른 여자 갖는 것을 오늘날의 여자는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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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의 세계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세상적 윤리가 맞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이들의 윤리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저 세상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 있을 때 원 없이, 편안하게, 누리면서 사는 것,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윤리이다. 그것이 때로 일상을 일탈했다고 하여 손가락질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윤리는 그렇지 아니하다.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부활과 심판을 믿는다. 이 세상의 삶은 잠깐 지나가는 것이라고 믿는다. 처음과 끝이 분명하며, 태어남과 죽음이 분명한 윤리이다. 이 세상은 어짜피 그렇고 그런데,  이래도 한평생 저래도 한 평생의 윤리가 아니다.

 

기독교 윤리 중에서 개신교의 윤리는 탁월하다.

천주교에서는 죽은 후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개신교와 다르다.  집단적 윤리가 개인의 윤리를 압도한다. 이 땅에 남아 있는 친척이나 성직자가 죽은 그를 위해 기도하며 선을 행하면 죽은 이의 죄도 사해질수 있다고 주장한다.  극단적인 사건이 면죄부 사건이다.  그러므로 천주교의 윤리는 세상과 타협적이다. 하나님과 개인이 1:1의 관계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성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흔히 유럽이 기독교 문화권이라고 하지만 개신교 문화권과 천주교 문화권이 확연히 다르다. 

독일,영국,미국이 개신교 문화권이라면 프랑스,이태리는 천주교 문화권이다. 성윤리를 비교하더라도 그렇다.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 이태리의 베르루스코니 총리 등 정치인의 성추문에 대한 천주교 문화권의 반응은 관대하다.   반면 미국,영국,독일 등 개신교  정치권에서는 성추문에 휩싸이면 정치에서 치명상을 입는다.  

 

그리고 경제관 그렇다. 각자는 자기가 맡은 곳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이라는 직업 소명 의식을 갖는다. 공동체 윤리보다는 개인의 윤리를 중요시 한다.  '공동체 안에서 나의 역할보다는,내가 공동체를 어떻게 변화시킬수 있나'라는 개인에서 출발하는 공동체 윤리를 생각한다. 적극적이다. 

 

그러므로 같은 기독교 문화권이라고 하더라도 미국,영국,독일 등 개신교 국가의 경제가 활력이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보장 제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프랑스,이태리, 남미 등 천주교 경제권은 노후를 국가와 사회가 책임진다는 원칙 하에서 설계되지만, 미국,영국 등 개신교의 사회 보장제도는 노후 역시 자기의 것은 자기가 책임진다는 기초 위에서 국가와 사회가 보조한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기업관이 더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다.

 

나는 개신교인 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