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아직도 하나님을 믿느냐고 반문하다. 요즘과 같은 과학 문명의 시대에 과거 미개했던 시절 아직 정신이 개화되지 못했던 시절의 체계에 머물러있느냐고 하면서 의아해 한다.
오늘날 과학적 사고는 인간의 육체적인 기능은 물론이요 정신의 작용까지도 뇌파의 화학적 작용으로 분석한다. 심리학을 통하여 인간이 왜 그렇게 사고하는지 심리현상으로 분석하며 종교적 성향 역시 그 심리의 성향의 한 부류로 분류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절대자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것은 과거 인간이 아직 사물을 알지 못했던 시대의 미개발 인간의 한계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하나님이 있고 그 외에 다른 신도 있어 이 세상은 신과 교류하면서 산다는 세계와 그런 세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는 유물론적 사고다. 이 세상은 오직 물질에서 출발했고 정신작용도 그 일환이라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실패한 제도로 판명은 되었지만 유물론은 대부분의 사람들 사고 속에 틀어박혔다.
그동안의 인간의 삶, 특히 의례적인 활동은 신을 전제로 한 행위였다. 태어나는 것은 신이 그렇게 하였고 결혼하는 것은 신이 짝지어주었다고 하였고 죽음은 신에게로 다시 갔다는 식이다. 이런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식은 신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이 인정되지 않는 시대에는 다른 시준이 들어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사람이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한 규범만이 있을 뿐이다. 소위 법과 제도라는 것이다. 윤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 동물의 세계에 윤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 유물론 국가인 중국이 그것을 시사한다. 동물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말이다. 동물세계는 일반 개체와는 다른 '영웅'이 존재한다. 우두머리는 일반 개체와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으면 그의 지배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소위 기존 가치체계의 기준으로 볼 때 비도덕적인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윤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가 동의한다면 어떠한 행위도 문제 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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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이다. 서로가 동의한다면 그 누구와의 성관계도 문제삼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제도도 틀일 뿐 상대방을 구속하지 않는다. 결혼한 배우자가 있는 것과 성적인 자유는 별개라는 것이다. 부부라 할지라도 그 개인적인 결정을 문제삼는 것은 미개한 사고로 여긴다. 배우자에게는 다만 책임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에서 성적인 책임을 다하고 경제적인 상호 책임의 범위 내에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면 되었지 밖에서 그 누구와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해도 법적으로 부부의 아이로 등재될 뿐이고 그것이 나의 아이인지 다른 누구의 아이인지도 알 필요가 없다. 부모는 다만 생물학적인 부모일 뿐이다. 아이들에게도 부모의 도덕적인 책임도 요구되지 않는다. 부모는 이들이 성인이 되기까지 부양의 책임만이 요구될 뿐이다. 자녀 역시 부모의 개인의 성적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비상식적인으로 여겨진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 결혼했다고 해도 혼외정사는 일반화되어 있다. 결혼은 앞으로 한 집에서 함께 동거한다는 약속일 뿐이다. 결혼식도 하지 않는다. 한다고 해도 서로 책임을 공유한다는 약속 정도를 하지 그에게 성적인 독점권을 인정하는 전통적인 혼인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로 조건이 달라지면 언제든지 결혼 계약은 파기할 수 있는 것이지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예 결혼을 하지 않기도 한다. 성적인 욕구는 필요에 따라 여러 상대를 번갈아 가면서 한다. 동물의 성생활과 같다.
비종교화의 시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돈이다. 이들이 탐닉하는 것은 돈이다. 자기의 안전을 지켜주고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것 삶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는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만족하며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으로 여겨진다. 자기 체면이라는 것이다. 황금만능시대다. 법적인 제재가 없는 한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돈을 벌면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건강이다. 성적인 자유와 물질적인 누림의 삶은 건강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건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더구나 이들에게 있어 소위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서 안락하고 만족한 삶을 끝까지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기 때문에.
이렇듯 비종교화의 시대의 특징은 결혼이 없어진다는 것, 양심이 필요없어지고 대신 사회 규범이 기준이 된다는 것, 고결한 인품이라는 것 등 존경받을 사람 대신 자기들을 위해 사회를 관리해 줄 능력이 출중한 한 '영웅'만을 필요고 하는 사회, 삶을 최고로 누리게 하는 돈을 성공의 척도로 여기는 사회, 그 기간을 최대한 누릴 수 있게 하는 건강을 추구하는 사회가 비종교화된 세상 사람들의 삶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을 얘기한다는 것은 현대적 기준과는 다른 마치 밀림에서 전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세상에 나온 과거의 시대에 머물러 사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마치 간간히 신문에 나오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줄도 모르고 인도네시아 깊은 산림 속에서 살면서 아직 천황폐하를 위해 마지막까지 산다고 고집하는 군국주의 일본의 장교와 같이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 본다. 신이 부정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인간은 그 신이 세상에 보냈다는 소명 의식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기준으로 볼 때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경전인 성경의 가르침대로 산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너무 답답하고 일방적이고 편협한 사고로 여겨질 것이다. 마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신념에 따라 사람을 참수하는 것을 알라의 뜻이라고 정당하다고 믿는 것과 같다. 그렇지는 않다하더라도 부르카를 쓰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그런 불편한 삶을 살듯이 이들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답답한 사람들이라고 여길 것이다. 성적인 순결, 양심이라는 기준은 법이라는 제도로 대체되었는데 아직도 양심을 운운하느냐는 태도인 것이다.
하나님이 부정되는 세상에서는 사실상 이런 사고 기준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렇 수 밖에는 없다. 아무 기준 가체가 없는데 자기들이 납득하지도 못하고 공감하지도 못하는 그 체계에 따라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기원을 설명할 때도 진화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오류에 빠져있음에도 이것을 믿고 있다. 과학적 사고로는 진화론이 증명되지 않았다. 과학적 기준이란 실험에 의하여 다시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합리적인 추론으로 점검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수억년 동안 진화했다는 근거를 댈 수 있는가. 그들은 인간의 기원을 뭔가로 설명을 해야하는데 이 방법 밖에는 없기 때문에 검증이 되지 않았지만 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기준이 나올 때까지는 '불완전한 이 논리'에 천착하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옛날 노아가 120년 동안이나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정신병자'처럼 세상이 곧 멸망한다고 외치면서('전도')하면서 그 때에 구조되기 위해 배를 만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여전히 햇빛이 쨍쨍 비치고 세상은 풍요롭게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고 모두 누리며 사는데 무슨 뚱땅지같은 소리냐는 것이다. 그것도 배는 바닷가에 있어야 하는데 왜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산 위에 배를 짓는가. 이것은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할 수 있는 일인가. 오늘날과 같은 현대에 '하나님이라니?' 참으로 가소롭고 어리석고 아직도 과거의 사고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라니. 더구나 그렇게 살려면 자기나 그렇게 살 일이지 왜 그것을 '전도'하는가.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소송감이야. 그리고 지옥 운운하는 것은 협박죄야.
또한 성경의 가르침대로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은 과거 이스라엘레서 살았던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과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고 농사도 짓지 않았고 장막에 거주하는 삶을 유다가 멸망하기까지 250년 이상을 그렇게 살았다. 그 당시 사람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세상적 방식에 따르고 있었다. 물질과 안락, 풍요였다. 그러나 성경이 요구하는 삶은 양심에 따른 절제와 자기희생이었다. 오늘날 대다수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들과 같다. 삶에서는 세상 사람의 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 진화론, 동성애, 오직예수를 주장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과거의 사고에 갖힌 사람들로 여겨진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이 종교, 저 종교 자기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여 살다가 죽으며 그의 행동에 따라 천국 지옥에 가는 것이지 오직 예수 믿음을 통해서만 천국에 간다는 논리는 도대체 뭐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 전도에 방해가 될 뿐이야. 모두가 교회를 배척한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어? 전도를 해도 지혜롭게 해야지. 그렇지 않아? 세상이 어떤지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신앙생활을 해야하는 것 아니야?
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선택은 여전히 각 개인의 몫이다. 노아의 삶, 레갑의 아들 요나답 자손의 삶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이다. 이 선택은 강요할 수는 없다. 여호수아가 마지막으로 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했듯이 말이다. 너희가 이 땅의 신을 선택하든지 하나님 신을 선택하든지 너희 자유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겠노라.
오늘날 과학적 사고는 인간의 육체적인 기능은 물론이요 정신의 작용까지도 뇌파의 화학적 작용으로 분석한다. 심리학을 통하여 인간이 왜 그렇게 사고하는지 심리현상으로 분석하며 종교적 성향 역시 그 심리의 성향의 한 부류로 분류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 절대자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것은 과거 인간이 아직 사물을 알지 못했던 시대의 미개발 인간의 한계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하나님이 있고 그 외에 다른 신도 있어 이 세상은 신과 교류하면서 산다는 세계와 그런 세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는 유물론적 사고다. 이 세상은 오직 물질에서 출발했고 정신작용도 그 일환이라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실패한 제도로 판명은 되었지만 유물론은 대부분의 사람들 사고 속에 틀어박혔다.
그동안의 인간의 삶, 특히 의례적인 활동은 신을 전제로 한 행위였다. 태어나는 것은 신이 그렇게 하였고 결혼하는 것은 신이 짝지어주었다고 하였고 죽음은 신에게로 다시 갔다는 식이다. 이런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식은 신과 연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이 인정되지 않는 시대에는 다른 시준이 들어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사람이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한 규범만이 있을 뿐이다. 소위 법과 제도라는 것이다. 윤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 동물의 세계에 윤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날 유물론 국가인 중국이 그것을 시사한다. 동물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 말이다. 동물세계는 일반 개체와는 다른 '영웅'이 존재한다. 우두머리는 일반 개체와는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으면 그의 지배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소위 기존 가치체계의 기준으로 볼 때 비도덕적인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윤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가 동의한다면 어떠한 행위도 문제 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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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이다. 서로가 동의한다면 그 누구와의 성관계도 문제삼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제도도 틀일 뿐 상대방을 구속하지 않는다. 결혼한 배우자가 있는 것과 성적인 자유는 별개라는 것이다. 부부라 할지라도 그 개인적인 결정을 문제삼는 것은 미개한 사고로 여긴다. 배우자에게는 다만 책임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에서 성적인 책임을 다하고 경제적인 상호 책임의 범위 내에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면 되었지 밖에서 그 누구와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해도 법적으로 부부의 아이로 등재될 뿐이고 그것이 나의 아이인지 다른 누구의 아이인지도 알 필요가 없다. 부모는 다만 생물학적인 부모일 뿐이다. 아이들에게도 부모의 도덕적인 책임도 요구되지 않는다. 부모는 이들이 성인이 되기까지 부양의 책임만이 요구될 뿐이다. 자녀 역시 부모의 개인의 성적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비상식적인으로 여겨진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 결혼했다고 해도 혼외정사는 일반화되어 있다. 결혼은 앞으로 한 집에서 함께 동거한다는 약속일 뿐이다. 결혼식도 하지 않는다. 한다고 해도 서로 책임을 공유한다는 약속 정도를 하지 그에게 성적인 독점권을 인정하는 전통적인 혼인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로 조건이 달라지면 언제든지 결혼 계약은 파기할 수 있는 것이지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예 결혼을 하지 않기도 한다. 성적인 욕구는 필요에 따라 여러 상대를 번갈아 가면서 한다. 동물의 성생활과 같다.
비종교화의 시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돈이다. 이들이 탐닉하는 것은 돈이다. 자기의 안전을 지켜주고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것 삶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는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만족하며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으로 여겨진다. 자기 체면이라는 것이다. 황금만능시대다. 법적인 제재가 없는 한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돈을 벌면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건강이다. 성적인 자유와 물질적인 누림의 삶은 건강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건강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더구나 이들에게 있어 소위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이 세상에서 안락하고 만족한 삶을 끝까지 누려야 하기 때문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기 때문에.
이렇듯 비종교화의 시대의 특징은 결혼이 없어진다는 것, 양심이 필요없어지고 대신 사회 규범이 기준이 된다는 것, 고결한 인품이라는 것 등 존경받을 사람 대신 자기들을 위해 사회를 관리해 줄 능력이 출중한 한 '영웅'만을 필요고 하는 사회, 삶을 최고로 누리게 하는 돈을 성공의 척도로 여기는 사회, 그 기간을 최대한 누릴 수 있게 하는 건강을 추구하는 사회가 비종교화된 세상 사람들의 삶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을 얘기한다는 것은 현대적 기준과는 다른 마치 밀림에서 전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세상에 나온 과거의 시대에 머물러 사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마치 간간히 신문에 나오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줄도 모르고 인도네시아 깊은 산림 속에서 살면서 아직 천황폐하를 위해 마지막까지 산다고 고집하는 군국주의 일본의 장교와 같이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 본다. 신이 부정되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인간은 그 신이 세상에 보냈다는 소명 의식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기준으로 볼 때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경전인 성경의 가르침대로 산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너무 답답하고 일방적이고 편협한 사고로 여겨질 것이다. 마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신념에 따라 사람을 참수하는 것을 알라의 뜻이라고 정당하다고 믿는 것과 같다. 그렇지는 않다하더라도 부르카를 쓰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그런 불편한 삶을 살듯이 이들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답답한 사람들이라고 여길 것이다. 성적인 순결, 양심이라는 기준은 법이라는 제도로 대체되었는데 아직도 양심을 운운하느냐는 태도인 것이다.
하나님이 부정되는 세상에서는 사실상 이런 사고 기준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렇 수 밖에는 없다. 아무 기준 가체가 없는데 자기들이 납득하지도 못하고 공감하지도 못하는 그 체계에 따라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세상의 기원을 설명할 때도 진화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오류에 빠져있음에도 이것을 믿고 있다. 과학적 사고로는 진화론이 증명되지 않았다. 과학적 기준이란 실험에 의하여 다시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합리적인 추론으로 점검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수억년 동안 진화했다는 근거를 댈 수 있는가. 그들은 인간의 기원을 뭔가로 설명을 해야하는데 이 방법 밖에는 없기 때문에 검증이 되지 않았지만 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기준이 나올 때까지는 '불완전한 이 논리'에 천착하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 옛날 노아가 120년 동안이나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정신병자'처럼 세상이 곧 멸망한다고 외치면서('전도')하면서 그 때에 구조되기 위해 배를 만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여전히 햇빛이 쨍쨍 비치고 세상은 풍요롭게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고 모두 누리며 사는데 무슨 뚱땅지같은 소리냐는 것이다. 그것도 배는 바닷가에 있어야 하는데 왜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산 위에 배를 짓는가. 이것은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할 수 있는 일인가. 오늘날과 같은 현대에 '하나님이라니?' 참으로 가소롭고 어리석고 아직도 과거의 사고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라니. 더구나 그렇게 살려면 자기나 그렇게 살 일이지 왜 그것을 '전도'하는가.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소송감이야. 그리고 지옥 운운하는 것은 협박죄야.
또한 성경의 가르침대로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은 과거 이스라엘레서 살았던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과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고 농사도 짓지 않았고 장막에 거주하는 삶을 유다가 멸망하기까지 250년 이상을 그렇게 살았다. 그 당시 사람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기는 했다. 그러나 세상적 방식에 따르고 있었다. 물질과 안락, 풍요였다. 그러나 성경이 요구하는 삶은 양심에 따른 절제와 자기희생이었다. 오늘날 대다수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들과 같다. 삶에서는 세상 사람의 방식과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 진화론, 동성애, 오직예수를 주장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과거의 사고에 갖힌 사람들로 여겨진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이 종교, 저 종교 자기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여 살다가 죽으며 그의 행동에 따라 천국 지옥에 가는 것이지 오직 예수 믿음을 통해서만 천국에 간다는 논리는 도대체 뭐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 전도에 방해가 될 뿐이야. 모두가 교회를 배척한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어? 전도를 해도 지혜롭게 해야지. 그렇지 않아? 세상이 어떤지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신앙생활을 해야하는 것 아니야?
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선택은 여전히 각 개인의 몫이다. 노아의 삶, 레갑의 아들 요나답 자손의 삶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이다. 이 선택은 강요할 수는 없다. 여호수아가 마지막으로 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했듯이 말이다. 너희가 이 땅의 신을 선택하든지 하나님 신을 선택하든지 너희 자유다.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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