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소천 19주기 추모예배(2020.3.28): 마태복음 5:1~12(온유한 사람)
오늘은 우리 가족사의 부끄러운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20대 시절 우리 친척 중 아저씨벌되는 분이 같은 산동리의 모 아가씨를 좋아했었는데 그 집안에서는 우리 집안을 일컫기를 '전에 가마를 지고 다니던 집안하고 어떻게 혼사를 맺겠느냐'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우리 할아버지들은 당시 무시당하는 천민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택시 운전한다 하면 무시하곤 하는데 하물여 당시 가마를 지고 다닌다하면 어떠했겠습니까?
나는 어릴 때는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도 60이 되면서 우리 할아버지가 불쌍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환경이었다보니 결혼인들 제대로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죽하면 딸(홍성고모)이 있는 우리 할머니와 결혼했겠습니까? 그 트라우마 때문에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싸우실 때 전남편 성을 들이대며 그 상처를 굵었지요. 그 말을 듣는 할머니는 어떠했겠습니까.
아버지의 인생 역시 고단했습니다. 아버지는 22살 때 큰어머니와 결혼했습니다. 큰어머니 19살 때였지요. 큰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28살 때였는데 사연은 이렇습니다. 할아버지가 집에 불을 놓고 '잘탄다, 잘탄다'하는 것을 보고 온 식구가 불을 껐는데 그 충격으로 큰어머니는 앓다가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할아버지가 완전 비정상적인 사람이었구나라고만 지금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할아버지가 이해가 가고 불쌍한 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불을 놓을 때에는 모든 소망이 없어졌고 모두 함께 죽고 싶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가끔 신문에 나오는 일가족이 함께 자살하는 그 참담한 상황인 것이죠. 가장이셨던 할아버지. 그분은 얼마나 힘드셨으면 그랬을까 애처로운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도 그렇습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나 첫 번째 결혼에서 실패하셨고 아버지와 재혼하셨습니다. 이런 가정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는 늘 불안에 떨며 사셨겠지요. 할머니는 당신의 갖고 있었던 컴플렉스가 며느리에게까지 있으니 원수처럼 매일 싸우실 수 밖에 없었지요. 어머니는 너무 힘들어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만큼은 편안히 돌아가시게 해야 겠다고 다짐을 하곤 합니다.
우리 집안이 이렇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모든 상처를 당신의 품에 품으셨습니다. 그 부정적인 문제들을 다 가슴에 품고 녹여내셨습니다. 아버지가 그냥 그 환경에 자신을 방치하셨다면 그 부정적 영향력이 3,4대를 갔을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런 아버지가 계셨기에 우리는 다시 소망을 갖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온유하신 분이었습니다. 내가 대전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대전에 오셨다가 돌아가실 때는 눈물을 보이실 만큼 마음이 여렸던 분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견디기 힘든 상황을 당하면 이런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사업을 하다가 너무 힘들면 때로는 아버지 산소를 찾기도 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나에 대하여 말할 때 '너는 사랑만 받고 자랐는데 네가 무슨 불만이 있느냐' 말하겠지만 전들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내가 원칙주의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원칙을 벗어나면 누군가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그렇게 몰아갔는지 모릅니다. 정서적으로 위축되고 방어적이되다보니 원칙을 지켜야만 안심이 되는 것입니다. 원칙을 지켜야만 그마나 나를 방어할 수 있다는 잠재의식이 작용했겠지요. 여유있는 가정에서 맘놓고 자란 자녀들은 원칙주의자들이기 보다는 자유분방합니다. 너무 그러다보니 방종하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요. 나는 내가 원칙주의자가 된 것이 불만입니다. 나도 맘대로 생각하고 맘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요.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혼자 해결하려고 합니다. 사업을 하면서 뇌진탕으로 쓰러질 때도,한 쪽 입이 돌아갔을 때도 그리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 모든 것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마다 도대체 신앙이 무엇인가 반문해보곤 했습니다. 너무 힘들 때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도 갔습니다. 아마도 내가 신앙인이 아니었다면 나도 그런 선택을 했을지 모르지요. 아니 그런 선택을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유혹은 이젠 그리스찬이라고 하여 비켜가지 않는 것을 봅니다. 비근하게 몇년전에 죽은 성완종씨의 위패에도 십자가가 있더군요. 작년도 죽은 정두언 국회의원도 안수집사라고 하더군요. 몇 년전에 죽은 최진실의 관에도 십자가가 있더군요.
모든 상황을 되집어보면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들이 합리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 우리 사람들이지요. 오죽하면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을 언급하면서 조상의 죄가 3~4대 간다고 했겠습니까? 그렇게도 조상의 부정적인 영향력를 끊어내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렇게도 부모의 그 한계, 인간의 한계의 영향을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끈질긴 죄의 고리, 그 끈질긴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요? 사탄은 그 죄의 고리를 무기로 그 후손들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3,4대를 그렇게 물고 늘어집니다. 우리가 거기에 굴복해야 할까요? 내가 태어난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어쩔수 없어.라고 자기 인생을 합리화해도 될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부정적 고리를 내 대에서 과감하게 끊어내는 것입니다. 내 부모의 대는 그럴지라도 반드시 내 대에서 그 부정적 고리를 끊어서 내 자식들은 자유하면서 살게 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바울은 고린도후서5:17에서 선포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조상 대에서 내려오던 부정적인 것이 있다고 해도 내 대에서 끈어내는 능력입니다. 흐름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저주의 가문의 저주가 축복이 되게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조상들의 과거가 어떻든, 나의 과거 삶이 어떻든 그 부정적인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끊어내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 무엇입니까? 다시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에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부정적인 과거의 생각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믿음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왜 사람들이 자살을 합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절망합니까? 소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인생을 끝까지 이끌어가신다는 확신,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에 보내셨다는 소명감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담대함을 잃지 않게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그러나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은 앞으로도 우리를 변함 없이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은 끊어냅시다. 어떠한 현실의 문제도 극복하고 소망을 심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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