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8장
37장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가 본 장에서는 잠깐 유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의 세 아들과 큰며느리 다말의 이야기입니다. 유다의 아들은 엘,오난,셀라인데 엘의 행위가 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자 당시의 관례에 따라 오난이 형수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아이가 자기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형의 아이가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관계를 할 때 의도적으로 밖에 사정을 하게 되고 이것을 또한 하나님께서는 악하게 보셨기 때문에 그도 죽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유다는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며느리를 자기의 막내아들과 다시 결혼을 시켜야 하는데 또 죽게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장성하기 까지 친정에 있으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장성했어도 유다는 며느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마침 며느리가 살고 있는 동네가 갈 일이 있어 갔는데 며느리를 시아버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와 동침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은 아들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그 베레스는 예수님의 계보에 나오는 조상입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이런 부도덕한 일은 감추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것이지만 성경은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위인전 같은 경우에는 이런 부끄러운 사실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이렇게도 부족한 허물 많은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허물의 중심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친히 오신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몸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임하시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죄로 물들었다해도 문제가 있다해도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마굿간에 나신 예수님, 모순 가운데 나신 예수님.
교회에 거룩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허물 많은 인간이 올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본연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그 추한 모습에서 탄생하셨듯이 우리의 과거가 아무리 부끄럽다하더라도 우리는 새롭게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보통 신앙적이다 하고 말한다면 윤리적이냐 도덕적이냐를 생각합니다. 신앙은 윤리, 도덕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윤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도덕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신앙이 추구하는 것은 생명,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자유를 넘어설 수 있는 가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도덕,윤리,법도 사람이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굶어죽지 않기 위해 도둑질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으나 자기의 명예를 운운하며 자살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 앞에서 그 명예라는 것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살았다고 해도 돈에 매이고 체면에 매이고 명예에 매이고 제도에 매인다면 그는 참 인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종으로서 사느냐 자유자로 사느냐.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37장에서 요셉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가 본 장에서는 잠깐 유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의 세 아들과 큰며느리 다말의 이야기입니다. 유다의 아들은 엘,오난,셀라인데 엘의 행위가 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자 당시의 관례에 따라 오난이 형수와 결혼을 하게 되지만 아이가 자기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형의 아이가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관계를 할 때 의도적으로 밖에 사정을 하게 되고 이것을 또한 하나님께서는 악하게 보셨기 때문에 그도 죽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유다는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며느리를 자기의 막내아들과 다시 결혼을 시켜야 하는데 또 죽게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장성하기 까지 친정에 있으라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장성했어도 유다는 며느리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마침 며느리가 살고 있는 동네가 갈 일이 있어 갔는데 며느리를 시아버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와 동침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은 아들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그 베레스는 예수님의 계보에 나오는 조상입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이런 부도덕한 일은 감추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것이지만 성경은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위인전 같은 경우에는 이런 부끄러운 사실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은 이렇게도 부족한 허물 많은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허물의 중심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친히 오신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몸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임하시는 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죄로 물들었다해도 문제가 있다해도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마굿간에 나신 예수님, 모순 가운데 나신 예수님.
교회에 거룩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허물 많은 인간이 올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본연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가 그 추한 모습에서 탄생하셨듯이 우리의 과거가 아무리 부끄럽다하더라도 우리는 새롭게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보통 신앙적이다 하고 말한다면 윤리적이냐 도덕적이냐를 생각합니다. 신앙은 윤리, 도덕 그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윤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도덕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신앙이 추구하는 것은 생명,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자유를 넘어설 수 있는 가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도덕,윤리,법도 사람이 살기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굶어죽지 않기 위해 도둑질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으나 자기의 명예를 운운하며 자살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 앞에서 그 명예라는 것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살았다고 해도 돈에 매이고 체면에 매이고 명예에 매이고 제도에 매인다면 그는 참 인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종으로서 사느냐 자유자로 사느냐.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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